To Alice... ..., 1994
 
퇴화하는 시간
김승곤, 1995
 

왜 그의 사진이 늦여름 오후에 찍힌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른다. 오래 전 어느 관광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처럼 변색된 색조 때문일까. 아니면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에 녹아든 의식처럼 윤곽을 잃고 떠도는 사물들 때문일까.

억제된 희미한 광선에 의해 조명된, 무대 중심부의 덧없는 존재들은 주변의 적막한 어둠 속으로 지금 서서히 소멸되어 가려 하고 있다. 현실의 한쪽에 구멍이 뚫리고 그 저편에서 나타난 백일몽의 세계. 조금 전까지 깔깔대는 웃음소리나 비명처럼 하늘로 올라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찬 그 무대는 지금 공허하게 비어 있다. 그곳에 떠돌고 있는 것은 감각을 잠들게 하는 시간이다. 죽음을 향해 스스로 퇴화를 거듭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 비일상적인 시간을 체험하면서 거의 절망적인 감정을 느낀다.

우연하게 출현하는 회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회화의 공간은 변증법적인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출현한다. 그러나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완성되어 버린다. 현실의 한 장면을 찰라로 잘라내는 스냅 샷과 화면에 뛰어드는 돌발적인 우연은 사진의 본질적 특성이다. 사진에 있어서는 노출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 우연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비록 그 대상이 아무리 짧은 순간이거나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카메라의 눈길로 잡히지 않는 것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가는 그러한 사진의 능력을 구사해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고, 사진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사진가의 창조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매체에 불과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진들은 사진이라는 장치 그 자체가 가진 본질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진가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우연성을 배제하고, 감광물질 위에 찰라적이고 단편적인 순간 대신 압축된 시간을 노출시킨다면 어떤 세계가 출현할 것인가. 사진이 갖는 근원적인 힘을, 시간을 늘리고 광량을 억제하는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 사진의 본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박홍천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모두 30분 정도의 턱없이 긴 노출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광학의 원리와 감광물질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신기한 구경거리는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표상(表象)하고자 하는 세계가 시간이라는 개념에 깊이 관여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심으로부터 서서히 주변의 어둠 속으로 자지러지는 화면. 그 화면 가운데에 떠오르는, 렌즈를 열고 있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 이동에 따라 초점이 흐려진 사물들은 우리에게 어떤 불가능한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명료하고 중립적인 기술(記述)이 아닌 그의 불투명한 어법은 시간의 지속성과 상상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의 세계에 접근시키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보아온 사진의 일반적인 속성과는 먼 거리에 있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진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의 사진은 모든 존재가 소멸된 세계다. 한낮의 동물원이나 유원지에서는 인간도 짐승들도 시간의 뒤쪽으로 몸을 감추고 있으며, 식물과 무기질의 철골과 콘크리트 구조물들만이 희미한 광선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리는 불확실한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곳이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존재 증명임과 동시에 소멸된 그들에 대한 부재증명이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전체로서의 시간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왜 루이스 캐롤이 기억의 심연에서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의식의 조그만 핀홀을 통해 들어온 광선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내면에 젖어 들고, 불확실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 그것은 그의 사진이 소녀에 대한 우리들의 감미로운 기억을 불러내는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는 누구나가 간직하고 있는 과거 속의 불가사의간 일루젼이다. 시간적 일루젼은 광선의 게재를 전제로 생기는 현상이고, 그의 사진을 보는 한 박홍천은 이 광선의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힘의 일단에 대한 어떤 확증을 잡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 사진예술, 1995. 1.

사진비평가인 김승곤은 순천 국립대학교 석좌교수이며 사진비평상의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